토머스 A. 헨드릭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토머스 A. 헨드릭스는 1819년에 태어나 1885년에 사망한 미국의 정치인으로, 인디애나 주지사, 연방 상원의원, 미국의 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1848년 인디애나 주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1863년부터 1869년까지 연방 상원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남부 재건 정책에 반대하고 흑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헌법 개정에 반대표를 던졌다. 1872년 인디애나 주지사에 당선되었고, 1876년과 1884년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1884년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함께 당선되었으나, 이듬해 사망했다. 헨드릭스는 재정 보수주의자였으며, 노예제와 인종 문제에 대한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76년 미국 부통령 후보 - 윌리엄 A. 휠러
윌리엄 알몬 휠러는 미국의 정치인으로 뉴욕주 하원의원과 미국 하원의원을 거쳐 제19대 부통령을 지냈으며, "휠러 타협"으로 알려져 있고 뉴욕 북부 철도 사장과 뉴욕주 헌법 제정 회의 의장도 역임했다. - 그로버 클리블랜드 행정부의 각료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애들레이 E. 스티븐슨 1세는 19세기 미국 정치인으로, 하원의원과 우정차관을 거쳐 클리블랜드 대통령 재임 시절 부통령을 역임했으며, 이후 대선과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 후 정계를 은퇴했다.
토머스 A. 헨드릭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토머스 앤드루스 헨드릭스 |
출생일 | 1819년 9월 7일 |
출생지 | 미국 오하이오주 풀턴햄 |
사망일 | 1885년 11월 25일 |
사망지 | 미국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 |
안장지 | 크라운 힐 묘지 |
정당 | 민주당 |
배우자 | 엘리자 모건 |
자녀 | 1명 |
교육 | 하노버 대학교 (BA) |
직업 | 변호사 |
![]() | |
공직 | |
대통령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임기 시작 | 1885년 3월 4일 |
임기 종료 | 1885년 11월 25일 |
이전 | 체스터 A. 아서 |
이후 | 리바이 P. 모턴 |
부지사 | 레오니다스 섹스턴 |
임기 시작 | 1873년 1월 13일 |
임기 종료 | 1877년 1월 8일 |
이전 | 콘래드 베이커 |
이후 | 제임스 D. 윌리엄스 |
선거구 | 인디애나 |
임기 시작 | 1863년 3월 4일 |
임기 종료 | 1869년 3월 3일 |
이전 | 데이비드 터피 |
이후 | 대니얼 D. 프랫 |
미국 하원 의원 | 인디애나 |
선거구 | (1851–1853) (1853–1855) |
임기 시작 | 1851년 3월 4일 |
임기 종료 | 1855년 3월 3일 |
이전 | 윌리엄 브라운 |
이후 | 루시엔 바버 |
2. 초기 생애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본문 생략)
2. 1. 출생과 가족
토머스 A. 헨드릭스는 1819년 9월 7일, 오하이오주 머스킹검군의 이스트 풀턴햄과 제인스빌 근처 농장에서 존과 제인 (듀크) 헨드릭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덟 자녀 중 둘째였으며, 아버지는 펜실베이니아주 출신, 어머니는 버지니아주 출신이었다.[1]1820년, 생후 6개월 된 헨드릭스는 부모 및 형과 함께 인디애나주로 이주했다. 이는 당시 미국 하원의원이자 훗날 미국 상원의원(1825~1837)과 세 번째 인디애나 주지사(1822~1825)를 역임하게 되는 삼촌 윌리엄 헨드릭스의 권유 때문이었다. 가족은 처음 인디애나주 제퍼슨군 매디슨에 있는 삼촌 집 근처 농장에 정착했다가, 1822년 인디애나주 셸비군으로 다시 이주했다. 헨드릭스의 아버지는 성공한 농부이자 상점 주인이었으며, 앤드루 잭슨 대통령 시절 지역 토지 측량 부서장으로 임명되는 등 정치에도 관여했다. 셸비빌의 자택은 인디애나 민주당 지도자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고, 이 덕분에 헨드릭스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자연스럽게 노출되었다. 그는 평생 충실한 장로교 신자이자 잭슨파 민주당원으로 살았다.
헨드릭스는 셸비군 세미나리와 그린스버그 아카데미 등 지역 학교를 다녔다. 이후 장로교 재단이 운영하는 인디애나주 해노버의 해노버 대학교에 진학하여 1841년 졸업했다. 대학 시절 그는 평균적인 성적이었지만 뛰어난 토론 실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았다. 당시 동급생 중에는 훗날 인디애나 주지사가 되는 앨버트 G. 포터도 있었다.
대학 졸업 후, 헨드릭스는 셸비빌의 스티븐 메이저 판사 밑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843년에는 펜실베이니아주 체임버스버그에서 삼촌 알렉산더 톰슨 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8개월간 법률 과정을 이수했다. 같은 해 인디애나로 돌아와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셸비빌에 개인 법률 사무소를 열었다.
1843년경, 헨드릭스는 인디애나를 방문 중이던 오하이오주 출신의 엘리자 모건을 만났다. 2년간의 교제 끝에 재정적으로 안정되었다고 판단한 헨드릭스는 1845년 엘리자와 결혼했다. 부부 사이에는 아들 한 명이 있었으나 3살 때 세상을 떠났다. 훗날 이웃들은 헨드릭스가 아내 엘리자의 도움 없이는 정치적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당시 이웃은 "그녀는 관대하고 현명하며 신중하다. 세상에 나가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항상 그런 여성과 결혼하여 그것이 나타난다."라고 말했다.
2. 2. 인디애나주 이주와 교육
헨드릭스는 1819년 9월 7일 오하이오주 머스킹검군에서 태어났으나, 생후 6개월 만인 1820년 부모와 형을 따라 인디애나주로 이주하였다.[1] 이 이주는 당시 인디애나주 연방 하원의원이었고 훗날 인디애나 주지사(1822~1825)와 연방 상원의원(1825~1837)을 역임하게 되는 삼촌 윌리엄 헨드릭스의 권유로 이루어졌다. 가족은 처음에 매디슨 근처 삼촌의 농장에 정착했다가 1822년 인디애나주 셸비군으로 최종 이주했다.헨드릭스의 아버지는 성공한 농부이자 상점 주인이었으며, 앤드루 잭슨 대통령에 의해 지역 토지 측량 부서장으로 임명되는 등 지역 정치에도 참여했다. 아버지의 정치 활동 덕분에 헨드릭스의 집에는 인디애나주의 민주당 지도자들이 자주 방문했고,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정치적 환경에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성장 배경 속에서 그는 독실한 장로교 신자이자 잭슨파 민주당원으로 자라났다.
헨드릭스는 셸비군 세미나리와 그린스버그 아카데미 등 지역 학교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다. 이후 장로교에서 운영하는 해노버 대학교에 진학하여 1841년 졸업했다. 대학 시절 그는 평균적인 학생이었지만, 토론에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훗날 인디애나 주지사가 되는 앨버트 G. 포터는 그의 대학 동기였다.
대학 졸업 후, 헨드릭스는 법률 공부에 매진했다. 그는 셸비빌의 스티븐 메이저 판사 밑에서 법률을 배웠으며, 1843년에는 펜실베이니아주 체임버스버그에 있는 삼촌 알렉산더 톰슨 판사의 법률 학교에서 8개월간 추가로 수학했다. 같은 해 인디애나로 돌아와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셸비빌에 자신의 법률 사무소를 개업했다.
2. 3. 결혼과 가족
헨드릭스는 인디애나주 셸비빌에서 법률 업무를 시작한 후, 그곳에서 언니 엘리자베스 모건 웨스트 부인을 방문 중이던 오하이오주 노스 벤드 출신의 엘리자 캐롤 모건(Eliza Carol Morgan)을 만났다. 2년간의 교제 끝에 두 사람은 1845년 9월 26일 오하이오주 노스 벤드에서 결혼했다. 부부에게는 1848년 1월 16일에 태어난 아들 모건(Morgan)이 있었으나, 1851년 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토머스와 엘리자 헨드릭스 부부는 1860년 인디애나폴리스로 이사했으며, 1865년부터 1872년까지 현재 베이츠-헨드릭스 하우스로 알려진 사우스 뉴저지 스트리트 1526번지에 거주했다.[2][3]옛 이웃은 헨드릭스가 아내 엘리자 없이는 정치적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회고하며 그녀를 "관대하고 현명하며 신중하다. 세상에 나가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항상 그런 여성과 결혼하여 그것이 나타난다."라고 평가했다.
3. 정치 경력
헨드릭스는 1840년대부터 1885년 사망할 때까지 법조계와 주 및 전국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의 정치 경력은 1848년 인디애나주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시작되었고, 이후 1850년부터 1851년까지 인디애나 헌법 제정 회의의 대표로 활동했다.
1851년부터 1855년까지는 민주당 소속으로 미국 하원에서 인디애나주를 대표했다. 하원의원 시절 그는 캔자스-네브래스카법 지지 등 논란이 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1854년 재선에는 실패했다.
하원의원 임기 후 1855년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에 의해 연방 토지국(United States General Land Office) 국장으로 임명되어 1859년까지 재직했다. 이후 제임스 뷰캐넌 행정부와의 정책적 견해 차이로 사임하고 인디애나로 돌아왔다.
헨드릭스는 인디애나 주지사직에 세 차례(1860년, 1868년, 1872년) 도전했다. 처음 두 번의 선거에서는 공화당 후보에게 패배했지만, 1872년 세 번째 도전에서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어 미국 남북 전쟁 이후 인디애나주 최초의 민주당 주지사가 되었다.
주지사 선거 도전 사이인 1863년부터 1869년까지는 미국 상원에서 인디애나주를 대표했다. 남북 전쟁과 재건 시대 동안 상원 민주당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며 연방 유지를 지지했지만, 노예제 폐지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권리 확대를 위한 헌법 제13조, 제14조, 제15조 개정안과 급진적 재건 정책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1868년 공화당이 주 의회 다수당이 되면서 상원의원 재선에는 실패했다.
1873년부터 1877년까지 인디애나 주지사로 재직하는 동안에는 1873년 공황 이후의 경제적 어려움에 대처하고, 선거 및 사법 개혁을 추진했으며, 새로운 인디애나 주청사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
헨드릭스는 1876년과 1884년 두 차례 미국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1876년 선거에서는 새뮤얼 J. 틸던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여 일반 투표에서는 승리했으나, 선거인단 투표 결과에 대한 논란 끝에 패배했다. 1884년 선거에서는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885년 3월 4일 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취임한 지 약 8개월 만인 1885년 11월 25일, 인디애나폴리스 자택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3. 1. 초기 정치 경력: 인디애나 주 하원의원 및 헌법 제정 회의 대표
헨드릭스는 1840년대부터 1885년 사망할 때까지 법조계와 주 및 전국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그는 1848년 휘그당 후보였던 마틴 M. 레이(Martin M. Ray)를 물리치고 인디애나주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1년 임기를 수행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1850년부터 1851년까지 열린 인디애나 헌법 제정 회의에 셸비 카운티 대표 두 명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헌법 제정 회의에서 헨드릭스는 주의 타운십과 카운티 조직을 만드는 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주 헌법의 조세 및 재정 부분을 결정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그는 다양한 직책의 권한에 대한 조항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사법부를 지지하고 대배심 제도 폐지를 주장했다. 한편, 헨드릭스는 이 회의에서 인종 분리를 조장하고 자유 흑인들의 인디애나주 이주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이른바 '흑인법' 제정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3. 2. 연방 하원의원 (1851-1855)
헨드릭스는 1850년 미국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1851년 3월 4일부터 1855년 3월 3일까지 제32대 및 제33대 미국 의회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인디애나주를 대표했다. 하원의원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제32대 의회에서 미국 하원 여비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제33대 의회에서는 미국 하원 장애군인 연금 위원회에서 활동했다.하원에서 헨드릭스는 일리노이주의 민주당 상원의원 스티븐 A. 더글러스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더글러스가 주도한 논쟁적인 캔자스-네브래스카법(1854년)을 지지했다. 이 법안은 미주리 타협을 사실상 무효화하고, 서부 영토 주민들이 인민 주권론 원칙에 따라 노예제 허용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헨드릭스는 이 법안에 대한 자신의 찬성 투표가 지역구 주민들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라고 믿었지만, 노예제 확대를 우려한 북부에서는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반발은 기존 휘그당의 해체와 새로운 공화당의 등장을 촉진하는 정치적 격변으로 이어졌다.
또한 헨드릭스는 무지당 운동의 외국인 혐오(출생주의)를 비판하며 이민자와 종교적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종 문제에 있어서는 한계를 드러냈다. 하원의원이 되기 전인 1849년 인디애나주 헌법 제정 회의 대표단으로 활동할 당시, 그는 인종 차별을 제도화하고 자유 흑인의 주 이주를 제한하는 소위 '흑인법' 제정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결국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 지지는 그의 정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54년 재선에 도전했을 때, 그는 이 법안에 반대하는 자유토지파, 노예제 폐지론자, 금주법 옹호자, 무지당, 옛 휘그당 세력 등이 연합한 후보에게 패배했다. 헨드릭스는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 지지가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인정했다.
의회에서 물러난 후, 헨드릭스는 1855년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에 의해 미국 내무부 산하 일반 토지국(General Land Office) 국장으로 임명되어 1859년까지 재직했다. 더글러스파 민주당원으로서 반(反)더글러스 성향의 제임스 뷰캐넌 행정부와 갈등을 겪다가 결국 사임하고 인디애나주로 돌아왔다.
3. 3. 연방 토지국장 (1855-1859)
1854년 하원 재선에 실패한 후, 헨드릭스는 1855년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내무부 산하 연방 토지국(General Land Office) 국장으로 임명받아 1859년까지 재직했다. 당시 연방 토지국은 서부 개척으로 인해 정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토지 매각을 처리하고 있었으며, 180명의 서기와 4년 치에 달하는 미처리 업무를 안고 있는 힘든 자리였다.헨드릭스는 재임 기간 동안 40만 건의 토지 소유권 증서를 발급하고 2만 건의 토지 분쟁 사건을 해결했다. 또한 수천 건의 토지 소유권 분쟁에 대한 결정을 내렸는데, 그의 결정 중 법원에서 번복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가 해당 직책에 대한 경험이나 자격이 부족했으며, 재임 중 내려진 일부 판결이나 서한이 항상 정확하지는 않았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4]
헨드릭스는 1859년 국장직에서 사임하고 인디애나주 셸비군으로 돌아갔다. 공식적인 사임 이유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피어스의 후임인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과의 정책적 견해 차이가 주요 원인으로 여겨진다. 헨드릭스는 뷰캐넌이 연방 토지국 서기직을 엽관제로 삼으려는 시도에 저항했으며, 행정부의 친노예제 정책에도 반대했다. 또한 뷰캐넌 대통령이 반대한 자유토지법(homestead bill)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3. 4. 인디애나 주지사 선거 출마 (1860, 1868, 1872)
헨드릭스는 1840년대부터 1885년 사망할 때까지 법조계와 주 및 전국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세 차례(1860년, 1868년, 1872년)에 걸쳐 인디애나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세 번째 시도에서 성공했다. 이는 미국 남북 전쟁 이후 인디애나주에서 주지사직을 차지한 첫 민주당원이었다.=== 1860년 선거 ===
1860년 첫 주지사 선거에서 헨드릭스는 데이비드 터피를 러닝메이트로 하여 출마했으나, 공화당의 헨리 S. 레인 후보와 올리버 P. 모턴 부지사 후보에게 패배했다. 당시 주지사 선거에 나섰던 네 명의 주요 후보 중 세 명(레인, 모턴, 헨드릭스)은 결국 인디애나 주지사를 역임했고, 네 명 모두 미국 상원의원이 되었다.
정당 | 후보 | 득표수 | 득표율 |
---|---|---|---|
공화당 | 헨리 S. 레인 | 139,675 | 51.8% |
민주당 | 토머스 A. 헨드릭스 | 129,968 | 48.2% |
=== 1868년 선거 ===
8년 뒤인 1868년, 헨드릭스는 두 번째로 인디애나 주지사 선거에 도전했다. 그는 현직 주지사이자 공화당 후보인 콘래드 베이커와 맞붙어 접전을 벌였으나, 불과 961표 차이로 아쉽게 패배했다. 베이커는 1864년 부주지사로 선출되었고, 1867년 모턴이 미국 상원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주지사직을 승계한 인물로, 나중에는 헨드릭스의 법률 파트너가 되기도 했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화당의 율리시스 S. 그랜트 후보와 그의 러닝메이트이자 인디애나 출신인 슐라일러 콜팩스가 인디애나에서 2만 표 이상의 큰 차이로 승리했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주지사 선거에서 헨드릭스가 보여준 근소한 패배는 그가 인디애나 주 내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두 번째 주지사 선거에서 패배한 후, 헨드릭스는 1869년 3월 미국 상원의원 임기를 마치고 인디애나폴리스로 돌아와 개인 변호사 업무에 복귀했지만, 주 및 국가 정치와의 관계는 계속 유지했다.
정당 | 후보 | 득표수 | 득표율 |
---|---|---|---|
공화당 | 콘래드 베이커 | 171,575 | 50.1% |
민주당 | 토머스 A. 헨드릭스 | 170,614 | 49.9% |
=== 1872년 선거 ===
1872년, 헨드릭스는 세 번째 도전에 나서 마침내 인디애나 주지사 당선에 성공했다. 그는 공화당의 토머스 M. 브라운 장군을 상대로 189,424표를 얻어 188,276표를 얻은 브라운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승리했다.
정당 | 후보 | 득표수 | 득표율 |
---|---|---|---|
민주당 | 토머스 A. 헨드릭스 | 189,424 | 50.1% |
공화당 | 토머스 M. 브라운 | 188,276 | 49.9% |
3. 5. 연방 상원의원 (1863-1869)
1861년 남북 전쟁 발발 당시 인디애나주 민주당은 평화파와 연방 유지파로 나뉘었다. 헨드릭스는 연방 유지를 지지하는 "전쟁 민주당원"의 지도자가 되었고, 반면 당시 상원 임시 의장이었던 제시 D. 브라이트는 평화파를 이끌었다. 브라이트는 1862년 2월, 아메리카 연합국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에게 연합국이 인디애나주 제조업자로부터 총기를 구입하도록 추천하는 편지를 보낸 사실이 드러나 상원에서 축출되었다.[1] 브라이트의 축출 이후, 데이비드 터피가 남은 임기를 채웠고, 인디애나주 의회는 다음 임기 상원의원으로 헨드릭스를 선출했다. 이 과정에서 브라이트는 자신의 정치적 몰락을 헨드릭스 탓으로 돌렸다.[1] 헨드릭스는 주 의회 내 평화파 민주당원들의 반전 결의안 통과 시도를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1]
헨드릭스는 1863년 연방 상원의원으로 취임했으며, 당시 상원은 33명의 공화당 의원에 비해 민주당 의원은 10명에 불과한 소수였다.[1] 그는 곧 상원 민주당의 지도적인 인물로 부상했다.[1] 헨드릭스는 확고한 당파성을 보였지만, 그의 연설은 잘 준비되었고 논리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1] 저널리스트 A. K. 매클루어는 헨드릭스가 전쟁이라는 어려운 시기에도 정치적 실수를 피하며 기록을 남겼다고 평가했다.[1]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헨드릭스와 같은 전쟁 민주당원들의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다. 1865년 3월, 의회 휴회를 앞두고 헨드릭스가 링컨을 방문했을 때, 링컨은 "우리는 정치적으로 달랐지만, 상원의원께서는 행정부를 공정하게 대해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 전쟁 후 재건 시대 동안 헨드릭스는 링컨 행정부의 정책을 언급하며 남부 주들의 조속한 연방 복귀를 주장했고, 급진적인 재건 정책에 반대했다.[1][3] 그는 노예제가 헌법적으로 완전히 폐지되기 전까지 도망노예법 폐지를 반대했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투표권 획득을 막으려 했다.[1] 헨드릭스는 인종 문제에 대해 "우리는 같은 인종이 아니며... 하나의 정치 공동체를 구성해서는 안 될 정도로 매우 다르다"고 공공연히 발언하며 인종차별적인 견해를 드러냈다.[1]

헨드릭스는 상원에서 징병제나 그린백 발행과 같은 전시 법안에 반대했지만, 연방 유지를 지지하고 전쟁 수행을 위한 예산안에는 꾸준히 찬성표를 던졌다.[4][3] 그는 헌법 제13조, 제14조, 제15조 개정안(각각 노예제 폐지, 시민권 부여, 흑인 투표권 보장)에 모두 반대했다.[4] 그는 남북 전쟁 직후에 헌법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하는 것이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흑인 해방 자체는 지지하며 "그는 자유롭다. 이제 그를 자유롭게 두라"고 말했지만,[3] 재건 법안에는 반대했고 인종 평등을 믿지 않았다.[4][6] 인디애나주 상원의원 올리버 P. 모턴과의 논쟁에서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하며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시각을 드러냈다.
: "나는 2천 년 동안 스스로를 향상시킬 수 없다는 역사를 보여준 종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 지난 2천 년 동안 백인이 위로 올라가고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스스로에게 의존하는 흑인 종족은 어디에서나 쇠퇴하거나 제자리에 머물렀습니다. ... 이 종족은 무엇을 만들어냈습니까? 세계에 유익한 발명품을 단 하나라도 만들어냈습니까? ... 이 종족은 노예 제도로 야만 상태로 전락한 것이 아닙니다. ... 이 종족과 백인 종족의 접촉의 영향은 이 종족이 가진 모든 향상을 가져다주었고, 그 영향력의 외부에서는 이 종족은 역사 전체에서 어디에서도 향상되지 않았습니다. ... 이 종족이 만든 유용한 발명품, 전사가 이웃을 때려 죽이는 곤봉보다 더 중요한 단 하나의 발명품을 말해 줄 수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5]
헨드릭스는 또한 앤드류 존슨 대통령 탄핵 시도에도 반대했다.[4]
1868년, 공화당이 인디애나주 의회 다수당을 차지하면서 헨드릭스는 상원의원 재선에 실패했고,[4] 그의 자리는 공화당의 다니엘 D. 프랫에게 돌아갔다.
3. 6. 인디애나 주지사 (1873-1877)
1872년, 헨드릭스는 세 번째 도전 끝에 인디애나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8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그의 높아진 전국적 인기를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민주당은 자유공화당 후보였던 호러스 그릴리를 지명했지만, 그릴리가 선거 직후 사망했다. 선거인단 투표가 이루어지기 전에 그릴리가 사망했기 때문에, 그릴리에게 투표하기로 되어 있던 민주당 선거인 63명 중 42명이 헨드릭스에게 표를 던졌다.헨드릭스는 1873년 1월 13일부터 1877년 1월 8일까지 인디애나 주지사로 재직했다. 그의 임기는 1873년 공황 이후 경제 불황과 겹쳐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인디애나 주는 높은 실업률, 기업 도산, 노동쟁의, 농산물 가격 하락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헨드릭스는 클레이 카운티 광부들과 로건스포트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두 차례 주 방위군을 동원하기도 했다.
헨드릭스는 선거 및 사법 개혁 관련 법안 제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지만,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한 주 의회는 그의 다른 여러 입법 계획을 가로막았다. 1873년 헨드릭스는 금주 운동과 관련된 '벡스터 법안'에 서명했다. 이 법안은 엄격한 지역 선택제를 도입하여 논란이 많았는데, 헨드릭스 개인적으로는 면허 제도를 더 선호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법안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고, 인디애나 주 의회 다수와 주민들의 의지를 반영한다고 판단하여 서명했다. 그러나 이 법은 실제로 시행하기 어렵다는 것이 드러나 1875년 폐지되었고, 헨드릭스가 선호했던 면허 제도로 대체되었다.
헨드릭스 주지사 재임 기간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새로운 인디애나 주청사 건설을 위한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1835년부터 사용해 온 기존 청사는 너무 낡고 비좁아져서, 늘어나는 주 정부 업무를 위해 인디애나폴리스 곳곳에 추가로 사무실을 임대해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낡은 청사는 대대적인 수리가 필요했다. 1867년에는 하원 의사당 지붕이 무너졌고, 1873년에는 공공 검사관이 건물을 사용하기에 부적합하다고 판정했다. 헨드릭스 재임 중에 새로운 주청사 건설 자금 마련 논의가 시작되었고, 그가 퇴임한 후인 1880년에 기공식이 열렸을 때 헨드릭스는 기념식에서 기조연설을 맡았다. 새로운 주청사는 8년 뒤 완공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3. 7. 부통령 후보 (1876, 1884) 및 부통령 (1885)
헨드릭스는 1876년과 1884년에 미국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며, 1884년에 당선되었다.[2] 민주당은 1880년에도 헨드릭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려 했으나,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이를 고사했다.[3] 1880년 아칸소주 핫스프링스 방문 중 마비 증세를 겪었으나 공직 활동을 이어갔고, 그의 건강 악화는 가족과 의사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2년 후에는 서 있기도 힘든 상태가 되었다.[4]=== 1876년 선거 ===

1873년 대불황 이후 경제 위기 속에서 헨드릭스는 농업 개혁과 통화 팽창(소위 "어음" 발행)을 지지하는 입장과 연결되었다. 이는 통화량 부족이 불황의 원인이며, 통화 팽창이나 은화 증산이 농민 부채 부담을 완화할 것이라는 화폐 개혁론자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는 금본위제를 지지하는 동부 금융계의 우려를 샀다.
1876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경화(硬貨) 지지파는 뉴욕주 주지사 새뮤얼 J. 틸던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당내 세력 균형을 위해 통화 팽창론자인 헨드릭스가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5] 헨드릭스는 세인트루이스 전당대회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뉴욕과 인디애나, 그리고 남부 주들을 공략하려는 당의 전략에 따라 인디애나 대표단의 추천으로 만장일치 지명을 받았다.[6]
선거 결과, 틸던-헨드릭스 조는 일반 투표에서 다수를 얻었으나, 선거인단 투표 결과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루이지애나주, 플로리다주, 오리건주의 결과가 분쟁에 휩싸이며 공화당의 러더퍼드 B. 헤이스- 윌리엄 A. 휠러 조와 첨예하게 대립했다. 양측 모두 해당 주의 선거인단 표를 주장하는 가운데, 의회는 특별 선거인 위원회(상원 5명, 하원 5명, 대법원 5명)를 구성하여 결과를 결정하도록 했다. 공화당이 8대 7로 다수를 차지한 위원회는 논란이 된 20표의 선거인단 표 전부를 헤이스에게 배정하는 당파적 결정을 내렸고, 헤이스가 1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7] 틸던과 헨드릭스는 결과에 깊이 실망했으나, 또 다른 내전을 피하기 위해 이를 수용했다.[8] 이후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선거를 도둑맞았다는 불만이 오랫동안 제기되었다. 선거 패배 후 헨드릭스는 부인과 함께 유럽을 여행하며 실망감을 달랬다.
=== 1884년 선거 ===

1884년 대선을 앞두고, 1876년 헨드릭스의 러닝메이트였던 새뮤얼 J. 틸던이 건강 문제(마비성 뇌졸중)로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민주당 경선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헨드릭스는 꾸준히 대선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오히려 이것이 그의 후보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평가도 있었다. 당내에서는 오랜 야당 생활을 청산하고 승리를 가져올 새로운 인물을 찾으려는 분위기가 있었다.
헨드릭스는 1884년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에 전 인디애나주 상원의원 조지프 E. 맥도널드를 지지하는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러나 그가 대회장에 등장하자, 1876년 선거에서 아깝게 패배했던 '옛 후보'의 등장은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대회가 뉴욕주의 개혁 성향 주지사 그로버 클리블랜드 중심으로 흘러가자, 클리블랜드 반대파(특히 뉴욕의 태머니 홀 세력)는 헨드릭스를 중심으로 결집하려 시도했다. 존 켈리 등이 헨드릭스를 연호하며 분위기를 띄웠으나, 클리블랜드 측이 이를 간파하고 대표단들의 동요를 막았다.
클리블랜드 지지자들은 뉴욕주 확보의 중요성과 클리블랜드가 공화당 내 자유주의 성향 유권자("중도 정치가들")를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우위를 점했다. 결국 2차 투표에서 클리블랜드가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다. 헨드릭스는 다시 한번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경화 성향의 클리블랜드와 균형을 맞추고 핵심 경합주인 인디애나에서의 승리를 도모하는 역할을 맡았다.[9]
승리 가능성에 고무된 헨드릭스는 미국 정치사상 가장 혼탁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 선거에서 활발하게 유세하며 "공천 후보를 위한 힘의 옹호자"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현직 공화당 행정부를 비판하고, 태머니 홀의 이탈을 막는 데 기여했으며, 연설마다 많은 청중을 동원했다. 그는 "세련된 지도자"로 칭송받았고, 명확하고 강력한 연설가로 평가받았다. 민주당은 1856년 이래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 부통령 재임 및 사망 ===

부통령으로서 상원으로 복귀한 헨드릭스는 처음에는 클리블랜드 대통령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농업 개혁을 위한 정부 개입을 주장해 온 헨드릭스와 자유방임주의 경제 및 사회 다윈주의적 관점을 가진 클리블랜드 사이에는 정책적 견해 차이가 분명했다.
또한, 펜들턴 공무원 개혁법 시행 이후 공직 임명(엽관제) 문제가 불거졌다. 오랜 야당 생활을 했던 민주당원들은 후원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클리블랜드는 이에 소극적이었다. 헨드릭스를 포함한 많은 민주당 상원의원들은 클리블랜드가 당의 요구를 무시한다고 느끼며 불만을 표출했다. 특히 인디애나주 민주당 조직의 비판이 거세지면서 헨드릭스는 "이권 운동자들의 부통령"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었다. 헨드릭스 자신은 이러한 비난이 정당 활동에 소극적인 이들로부터 나온다고 항변했다.
결국 1885년 여름, 당내 압력에 직면한 클리블랜드는 우정 차관을 "실질적인 정치를 이해하는" 전 일리노이주 하원의원 애들레이 E. 스티븐슨으로 교체했다. 스티븐슨은 공화당 출신 우체국장들을 민주당 인사들로 빠르게 교체하며 약 4만 개 이상의 자리를 바꾸었다.
1885년 9월, 헨드릭스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인디애나주 헌법 제정 회의 생존 회원 3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으며, 같은 달 아일랜드 독립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여 논란을 빚기도 했다. 12월 의회 개회를 앞두고 인디애나폴리스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11월 25일 향년 66세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사망으로 부통령직은 1889년 리바이 P. 모턴이 취임할 때까지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1]
4. 사망과 유산
헨드릭스는 1885년 11월 25일, 부통령 재임 중 인디애나폴리스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6] 그는 민주당 내에서 인기가 높았으며, 공화당 인사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재정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가졌고, 정직함과 확고한 신념을 지닌 연설가로 알려져 있었다.
4. 1. 사망
헨드릭스는 이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1880년 뇌졸중을 겪은 후 한쪽 발을 저는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8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여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885년 3월 4일 취임한 이후, 그는 클리블랜드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클리블랜드를 "예의 바르고 상냥하다"고 평가했다.[1]1885년 9월 8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헨드릭스는 아일랜드 독립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여 주목받았다. 이 연설 이후 보스턴의 정치인 마틴 로머스니는 그를 기념하여 헨드릭스 클럽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통령으로서의 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885년 11월 24일 저녁,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호소하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헨드릭스는 다음 날인 11월 25일, 인디애나폴리스 자택에서 수면 중 예상치 못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1][6] 향년 66세였으며, 임종 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마침내 자유로워졌다!"라고 전해진다.

헨드릭스의 장례식은 인디애나폴리스의 세인트폴 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비롯한 수백 명의 고위 인사들이 참석했으며, 수천 명의 시민들이 인디애나폴리스 시내에서 크라운 힐 묘지까지 이어지는 약 1.93km 길이의 장례 행렬을 지켜보았다. 그의 유해는 크라운 힐 묘지에 안장되었다.[6]
헨드릭스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정치적으로 여러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망으로 부통령직은 1889년 리바이 P. 모턴이 취임할 때까지 3년 이상 공석 상태로 남게 되었다.[1] 이는 10년 만에 두 번째로 부통령직이 장기간 공석이 된 사건이었으며, 대통령 유고 시 승계 문제에 대한 우려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당시 대통령 승계법(1792년 제정)은 상원 임시의장과 하원의장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헨드릭스 사망 당시 두 직위 모두 공석이었다. 당시 상원은 공화당이, 하원은 민주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어, 만약 대통령 유고 상황이 발생한다면 정치적 불안정성이 커질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매사추세츠주의 공화당 상원의원 조지 F. 호어의 제안에 따라 1886년 미국 의회는 기존의 대통령 승계법을 개정하여, 승계 순위에서 상원 임시의장과 하원의장을 제외하고 내각 각료 순서대로 승계하도록 변경했다. 이 제도는 1947년까지 유지되었다.
헨드릭스의 부재는 18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에도 영향을 미쳤다. 민주당은 헨드릭스를 대신할 부통령 후보로 전 오하이오주 상원의원 앨런 G. 서먼을 지명했지만, 인디애나주 출신인 헨드릭스가 없는 상황에서 민주당은 인디애나주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일반 투표에서 더 많은 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인단 투표에서 공화당의 벤저민 해리슨에게 패배하며 재선에 실패했다.
저명한 언론인 벤저민 펄리 푸어는 헨드릭스의 사망이 "불만을 품은 민주당원들이 규합하여 강력한 반대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던 구심점을 제거했다"고 평가하며, 그가 단순한 명목상의 부통령이 아니었음을 시사했다. 헨드릭스는 민주당 내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을 뿐 아니라 공화당 인사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재정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으며, 강력한 연설 능력과 정직함, 확고한 신념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4. 2. 유산
헨드릭스는 1885년 11월 25일, 인디애나폴리스로 귀가하는 여행 중 예상치 못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6] 그는 11월 24일 아침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호소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며, 다음 날 수면 중에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말은 Free at last!|마침내 자유로워졌다!eng라고 전해진다.
인디애나폴리스의 세인트폴 성공회 대성당(Saint Paul's Episcopal Cathedral)에서 거행된 헨드릭스의 장례식은 매우 성대했다. 당시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를 포함한 수백 명의 고위 인사들이 참석했으며, 수천 명의 시민들이 인디애나폴리스 시내에서 크라운 힐 묘지(Crown Hill Cemetery)까지 이어지는 약 약 1.93km의 장례 행렬을 지켜보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그의 유해는 크라운 힐 묘지에 안장되었다.[6]
헨드릭스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여러 정치적 파장을 낳았다. 우선,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잠재적인 경쟁자가 될 수 있었던 민주당 내 유력 인사가 사라졌다. 또한, 10년 사이에 두 번째로 부통령직이 3년 이상 공석 상태가 되면서 대통령직 계승 문제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만약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유고가 발생할 경우 누가 대통령직을 승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당시 시행 중이던 1792년 대통령 계승법은 상원 임시의장과 하원의장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헨드릭스가 사망했을 때 두 자리 모두 공석이었고, 상원은 공화당이, 하원은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화당 인사가 대통령직을 승계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매사추세츠주의 공화당 상원의원 조지 F. 호어의 제안에 따라 1886년 의회는 대통령 계승 순위에서 상하원 의장을 제외하고 내각 각료 순으로 승계하도록 하는 새로운 법률을 제정했다. 이 제도는 1947년 부통령직이 다시 장기간 공석이 되면서 계승 문제가 재검토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1888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노리던 클리블랜드와 민주당은 헨드릭스를 대체할 새로운 부통령 후보를 지명해야 했다. 전 오하이오주 상원의원 앨런 G. 서먼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클리블랜드는 인디애나주 출신 공화당 상원의원 벤저민 해리슨과 맞붙었다. 선거 결과, 민주당은 인디애나주 출신인 헨드릭스의 부재 속에 인디애나주에서 승리하지 못했고, 클리블랜드는 전체 득표수에서는 앞섰으나 선거인단 수에서 밀려 해리슨에게 패배했다.
헨드릭스의 사망은 당시 저명한 언론인 벤저민 펄리 푸어(Benjamin Perley Poore)가 지적했듯이 "불만을 품은 민주당원들이 결집하여 강력한 반대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던 중심 인물을 제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해니벌 햄린이 부통령직을 '마차의 다섯 번째 바퀴'(쓸모없는 존재)에 비유했던 것과는 달리, 헨드릭스가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음을 시사한다.
헨드릭스는 민주당 내에서 인기가 높았을 뿐 아니라 공화당 인사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재정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뛰어난 연설가로 명성을 얻었다. 또한 정직함과 확고한 신념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았다.
헨드릭스는 인디애나주가 대통령 선거에서 중요한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던 1868년부터 1920년 사이에 인디애나주 출신으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네 명의 인물 중 한 명이다. (이 시기 인디애나 출신으로 부통령이 된 다른 세 인물은 슐라일러 콜팩스, 찰스 W. 페어뱅크스, 토머스 R. 마셜이다.) 같은 기간 동안 조지 W. 줄리안, 조셉 레인, 새뮤얼 윌리엄스 판사, 존 W. 컨, 윌리엄 H. 잉글리시 등 다른 다섯 명의 인디애나 출신 정치인들도 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당선되지는 못했다.
5. 유산과 평가
토머스 A. 헨드릭스는 인디애나주 정치와 민주당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이지만, 그의 정치적 유산은 여러 측면에서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노예제와 인종 문제에 대한 그의 입장은 특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스티븐 A. 더글러스의 국민 주권 원칙과 캔자스-네브래스카 법령을 지지했으며, 인디애나주 헌법 제정 과정에서는 자유 흑인의 이주를 제한하고 인종 간 분리를 강화하는 정책을 주도했다. 이러한 행보는 무지당의 출생주의를 비판하며 이민자와 소수 종교 집단의 권리를 옹호했던 모습과는 대조를 이루며, 그의 정치적 입장에 모순적인 면모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1884년 부통령으로 당선된 후에는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과 여러 정책에서 의견 충돌을 빚었다. 특히 경제 정책에서 헨드릭스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과 농업 개혁을 주장한 반면, 클리블랜드는 불간섭주의 원칙을 고수했다. 또한, 공무원 임용 문제를 둘러싸고 엽관제 유지를 요구하는 민주당 내 여론을 대변하며 공무원 개혁법의 정신을 중시한 클리블랜드와 갈등했다. 이로 인해 그는 당내 엽관주의 세력의 대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헨드릭스는 부통령 취임 후 불과 8개월 만에 사망하여 행정부 내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의 정치적 경력과 입장은 남북전쟁 전후 미국 사회의 복잡한 정치 지형과 민주당 내 다양한 세력 간의 갈등을 반영하는 사례로 연구된다.
5. 1. 노예제와 인종 문제에 대한 입장
헨드릭스는 일리노이주 민주당 상원의원 스티븐 A. 더글러스의 지지자로서, 더글러스가 주도한 논쟁적인 캔자스-네브래스카 법령을 지지했다. 이 법령은 미주리 타협을 사실상 무효화하고, 새로 편입될 영토의 주민들이 "국민 주권" 원칙에 따라 노예제 허용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법안은 북부에서 큰 분노를 일으켰고, 기존의 휘그당이 해체되고 새로운 공화당이 등장하는 등 정치적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헨드릭스는 캔자스-네브래스카 법령에 대한 자신의 찬성 투표가 지역구 주민들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라고 믿었으나, 이 결정은 결국 1854년 재선 실패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었다. 당시 그는 자유 군인, 노예제 폐지론자, 절제 운동 지지자, 무지당 및 휘그당원들의 연합 세력 후보에게 패배했다.헨드릭스는 무지당 운동의 배타적인 출생주의를 비판하며 이민자들과 종교적 소수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과는 대조적으로, 인종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다. 1849년 인디애나주 헌법 제정 회의 대표단으로 활동할 당시, 그는 인종 간 분리를 강화하고 자유 흑인들의 주로의 이주를 제한하는 소위 "흑인법" 제정 운동을 이끌었다. 이는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했던 그의 다른 행보와는 모순되는 모습이었다.
5. 2. 경제 정책에 대한 입장
1884년 민주당은 그로버 클리블랜드를 대통령으로, 헨드릭스를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며 1856년 이후 처음으로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헨드릭스는 임기 시작부터 클리블랜드 대통령과 여러 면에서 의견 차이를 보였는데, 특히 경제 정책에 대한 입장이 크게 달랐다.헨드릭스는 농업 개혁을 지지했으며,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농민층의 어려움을 해소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반면,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불간섭주의 경제 원칙을 강하게 신봉했다. 그는 정부의 개입이나 온정주의적 정책이 오히려 국민성을 해친다고 보는 사회 다윈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근본적인 시각 차이는 공무원 임용 문제에서도 갈등을 일으켰다. 당시 펜들턴 법안에 따라 능력 중심의 공무원 제도를 확립하려는 개혁 움직임이 있었지만, 오랫동안 야당이었던 민주당 내부에서는 선거 승리에 기여한 당원들에게 관직을 분배하는, 이른바 엽관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매우 높았다.
헨드릭스 부통령을 포함한 많은 민주당 상원의원들은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당 조직의 이러한 후원 요구를 무시하자 그의 태도를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판하며 불만을 터뜨렸다. 클리블랜드는 이러한 요구를 구시대적인 잭슨주의적 이권 추구 행태나 화폐 개혁 반대론자들의 불평 정도로 치부했으며, 헨드릭스 부통령 역시 같은 부류로 여겼다.
결국 헨드릭스는 민주당 내 엽관주의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로 비춰지면서 "이원 운동자들의 부통령"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원 운동자'(spoilsman)는 엽관제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을 뜻하는 당시의 용어였다. 헨드릭스는 이러한 비판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이 "선거 운동의 열기와 먼지, 부담은 '소년들'(당의 일반 활동가들)과 자신이 짊어졌던 동안 그늘에서 편히 쉬려 했던 자들"이라고 생각하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1885년 여름, 당내 반발이 거세지자 클리블랜드는 결국 정치적 압력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공무원 개혁 성향의 우정 차관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실용적인 정치를 이해한다"고 평가받는 전 일리노이주 의원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을 임명했다. 스티븐슨은 임명되자마자 곧바로 대대적인 인사 교체에 착수하여, 4만 개가 넘는 공직에서 공화당 소속 인물들을 민주당 인사들로 빠르게 교체했다. 이는 클리블랜드의 초기 개혁 의지가 당내 현실 정치의 벽에 부딪혔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참조
[1]
웹사이트
Biography of Thomas A Hendricks
http://www.hendricks[...]
HendricksMn.com
2007-01-04
[2]
웹사이트
Bates-Hendricks House: Site Assessment
https://secure.in.go[...]
Indiana Department of Natural Resources
2016-08-22
[2]
웹사이트
National Register of Historic Places Inventory Nomination Form: Bates-Hendricks House
https://secure.in.go[...]
U.S. Department of the Interior, National Park Service
2016-08-22
[2]
웹사이트
SHAARD database
https://secure.in.go[...]
Indiana Department of Natural Resources, Division of Historic Preservation and Archaeology
2016-04-01
[3]
웹사이트
Bates-Hendricks House
http://www.in.gov/hi[...]
Indiana Historical Bureau
2016-08-22
[4]
서적
A History of the Rectangular Survey System
https://books.google[...]
United States Government Publishing Office
[5]
간행물
40th Cong., 3rd Sess.
1869-02-08
[6]
문서
Memorial Address on the Life and Character of Thomas A. Hendricks (Vice-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7]
웹사이트
Metal Standards: Silver Certificates
http://www.frbsf.org[...]
The Federal Reserve Bank of San Francisco
2013-05-23
[8]
웹사이트
Thomas A. Hendricks Library: Site Assessment
https://secure.in.go[...]
Indiana Department of Natural Resources
2016-08-22
[8]
웹사이트
National Register of Historic Places Inventory Nomination Form: Thomas A. Hendricks Library
https://secure.in.go[...]
U.S. Department of the Interior, Heritage Conservation and Recreation Service
2016-08-22
[8]
웹사이트
SHAARD database
https://secure.in.go[...]
Indiana Department of Natural Resources, Division of Historic Preservation and Archaeology
2016-04-01
[9]
문서
유권자 직접투표에서 과반수를 확보하였음에도 낙선한 후보자이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